초록

허균은 38세 되던 1606년(병오, 선조39) 원접사 종사관으로서 주지번을 만나 명나라 문단에 대해 깊이 이해하면서 왕세정 등 복고파의 문학 성과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허균은 왕세정 등 복고파가 성당시와 한위악부를 모범으로 삼은 것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스스로 「속몽시(續夢詩)」에서 악부를 제작했다. 또 허균은 왕세정이 「정희부(靜姬賦)」와 「후정희부(後靜姬賦)」에서 불우의 심사를 노래한 것에 공감했으며, 왕세정의 『열선전전(列仙全傳)』을 열람하고 자유분방한 의식에 동조하여 「열선찬(列仙贊)」을 지었다. 그러나 허균은 왕세정의 문학을 전범으로 숭앙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왕세정의 『열선전전』은 581선인의 고사를 수록했는데, 허균은 신선이 아닌 인물이나 허탄한 신선설의 주인공을 모두 배제했다. 또한 허균은 명나라 말 제자백가에 대한 관심의 고조에 호응하여 스스로 제자백가의 독후문(讀後文)을 남기되, 왕세정의 『독서후(讀書後)』는 참조하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7) 9월부터 다음 해 3월 초까지 동지겸진주사행 부사로서 중국에 있으면서 왕세정 편집으로 알려진 『검협전(劍俠傳)』을 탐독하고 왕세정의 「검객편(俠客篇)」과 「유협편(游俠篇)」을 읽고 그 원념(怨念)의 세계에 공감했다. 왕세정은 역사학에서도 중요한 성과를 냈지만 허균은 왕세정의 사학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세정의 역사 서술이 조선의 종계변무에 관해 불온한 기록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허균은 명대 중엽 이후의 박물고증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왕세정의 필기들을 크게 활용하지 않았다. 을병조천의 때에 허균은 양명학적 사유와 거리를 두고자 했고, 사념을 끊고 욕심을 다 없애 원명(圓明)의 깨끗함을 깨우치겠다고 다짐했으며, 결국 존덕성을 위해서는 도문학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중용』의 가르침을 재확인했다. 허균은 왕수인의 치양지가 존덕성의 방편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하되, 도문학을 통하지 않고는 존덕성을 충분히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가 특히 허균으로 하여금 왕세정의 시문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게 했을 것이다.

키워드

허균(許筠), 왕세정(王世貞),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엄주사부고(弇州四部稿), 속몽시(續夢詩), 정희부(靜姬賦), 열선찬(列仙贊), 열선전전(列仙全傳), 독서후(讀書後), 검협전(劍俠傳)

참고문헌(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