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귤현동은 고종 21년인 1884년 조(條)에 당산면(堂山面)의 굴재를 귤현리(橘峴里)로 명기(名記)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20년 이전에 형성된 마을이며 귤현동에서 서곶(西串)까지는 약 8km정도 떨어져 있다. 귤현동은 생활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예전부터 이주민이 별로 없었으며 이로 인해 서곶에서 제작된 항아리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수 있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서곶의 옹기점은 80여 년 전에 개점하였고 1960~1970년대까지도 아랫독점과 윗독점 이외에 시루점(질그릇)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루점은 일찍이 문을 닫고 아랫독점은 1970~1980년대에 광명단(산화납, Pb3O5)사건때 문을 닫았다. 현재는 윗독점(현재 신일산업)만이 생산방식을 바꾸어 서곶옹기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옹기점의 작업구성은 항아리를 만드는 대장과 시유와 그림 등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하는 거나꾼과 흙을 만드는 질꾼으로 나뉜다. 대장이 항아리를 만들어 손띠문, 근개띠문, 목질띠문, 압인문, 도롱테문 등을 시문하면 거나꾼이 잿물을 칠 때 항아리에 손그림을 그려 넣었다. 현대의 도시 집중적 주거환경과 핵가족 사회에서 인천의 옹기점은 주문생산에 의한 큰 항아리 제작 외에는 대부분 작은 항아리들과 다양한 기물에 맞추어 생산하게 되었고, 2007년을 전후해 작업 여건상의 문제로 손그림 작업을 중단하였다. 귤현동에서 수집한 서곶옹기의 손그림 문양은 크게 난초문(蘭草紋)과 학문(鶴紋), 학 연습문으로 나눌 수 있다. 난초문(蘭草紋)은 엄지나 검지로 난 줄기를 밑에서 위로 좌우대칭이 되게 올려 그린 후, 난 봉오리와 잎을 항아리의 크기에 따라서 3단, 2단 1단으로 정하여 그려준다. 학문(鶴紋)은 비상하는 학의 머리 방향에 따라 우(右)학, 좌(左)학, 수평(水平)학 이외에도 운학(雲鶴), 쌍학(双鶴), 좌학(座鶴) 등이 있으며 학 그림은 대체적으로 날개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검지·중지·약지·소지를 경우에 따라 사용하며 몸통은 엄지나 검지를 이용하여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키워드

손 그림, 서곶옹기, 귤현동, 난초문, 학문

참고문헌(4)open

  1. [단행본] / 1982 / 仁川市史 / 仁川直轄市 京畿出版社

  2. [단행본] / 2001 / 桂陽史 / 仁川市桂陽區 인천광역시 인쇄정보산업 협동조합 인천일보사

  3. [단행본] / 2001 / 桂陽의 어제와 오늘 / 인천광역시 인쇄정보산업 협동조합 인천일보사

  4. [단행본] / 2004 / 西歐史 / 인천광역시 서구, 인천광역시 인쇄정보산업 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