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시기는 한중 양국이 복잡한 정치적 관계 속에 있었지만 양국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얻기 드문 교류와 소통의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조선 문사들이 연행을 통해서만 중국에 가서 청조 문사들과 교류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조선에 온 중국 문사들과 직접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특히 청군 총독 오장경을 따라온 중국 강남 지역의 문사들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대진척독』, 『동묘영접록』, 『주계집』, 『화사척독』 등 일부 새로운 자료와 관련 문인들의 문집 등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한중 교류를 주도한 문인들로는 조선 측에서는 주로 김윤식, 김창희, 정기세, 김택영, 변원규, 조면호 등이 있고, 중국 측에는 오장경, 장건, 주명반, 주가록, 구심탄, 원세개, 이연호, 왕석창, 오조언, 모연년 등이 있으며 활발한 문화교류를 진행하였다. 한중 문사들은 시문을 창수하고 저술이나 시문집에 서발문을 써주거나 서적을 교환하고 ‘동문사’를 창립하고 ‘석자문’의 번역 간행에 공동 작업하는 등 전통적인 문학교류를 계승하고 발양하였다. 한편 시국과 관련하여 조선의 현실문제를 고민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대안을 서로 모색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대적 특성도 보여주었다. 김창희가 장건의 「조선선후육책」과 이연호의 「융막십의」를 수용하여 나름의 의견을 더 보충하고 개진하여 「육팔보」를 저술한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한중문학교류사와 19세기 한국한문학 연구에 있어서 상당히 큰 의의가 있다.
朝鮮壬午軍亂時期韓中兩國雖然處於比較複雜的政治外交關係,但對於兩國文人來說是一次難得的交流機會。因為此前只有朝鮮文人跟隨朝貢的燕行使臣遠赴中國的京城燕京,才有機會遇到清朝文人,并與之結交,但這次可以與隨軍來朝的中國文人直接見面交談,還可以與江南地域文人交流,實是難得機遇。又是在朝鮮境內的韓中文人交流,其意義非凡。從《大陣尺牘》、《東廟迎接錄》、《華使尺牘》、《周溪集》等新材料和相關文集等文獻的記載,可知這時期韓中交流的主要人生有以金允植、金昌熙、鄭基世、金澤榮、卞元圭、趙冕鎬為主的韓國文人,以吳長慶、張謇、朱銘盤、周家祿、邱心坦、袁世凱、李延祜、王錫鬯、吳朝彥、茅延年等為主的中國文人,他們進行了積極廣泛的文化交流。他們繼承和發揚了傳統的韓中文人文學交流的形式,如唱酬詩歌、互贈序跋、題寫對聯屏幅、交換書籍、創立同文社,譯刊 “惜字文” 等等。但也具有時代特徵,如對於外強的侵略擴張、朝鮮的貧困落後等問題,共同思索改革方案,互相交流意見,吸收和擴充,不斷完善和探索。如金昌熙吸收張謇的 “朝鮮善後六策” 和李延祜的 “戎幕十議” 的思想,再加上自己的獨特見解而著述《六八補》,就是典型事例。因此對壬午軍亂時期的韓中文人交流研究,從 “東亞文化” 的觀點出發,對19世紀的韓中文化交流史及韓國漢文學的研究有著相當重要的意義。
朝鮮壬午軍亂時期韓中兩國雖然處於比較複雜的政治外交關係,但對於兩國文人來說是一次難得的交流機會。因為此前只有朝鮮文人跟隨朝貢的燕行使臣遠赴中國的京城燕京,才有機會遇到清朝文人,并與之結交,但這次可以與隨軍來朝的中國文人直接見面交談,還可以與江南地域文人交流,實是難得機遇。又是在朝鮮境內的韓中文人交流,其意義非凡。從《大陣尺牘》、《東廟迎接錄》、《華使尺牘》、《周溪集》等新材料和相關文集等文獻的記載,可知這時期韓中交流的主要人生有以金允植、金昌熙、鄭基世、金澤榮、卞元圭、趙冕鎬為主的韓國文人,以吳長慶、張謇、朱銘盤、周家祿、邱心坦、袁世凱、李延祜、王錫鬯、吳朝彥、茅延年等為主的中國文人,他們進行了積極廣泛的文化交流。他們繼承和發揚了傳統的韓中文人文學交流的形式,如唱酬詩歌、互贈序跋、題寫對聯屏幅、交換書籍、創立同文社,譯刊 “惜字文” 等等。但也具有時代特徵,如對於外強的侵略擴張、朝鮮的貧困落後等問題,共同思索改革方案,互相交流意見,吸收和擴充,不斷完善和探索。如金昌熙吸收張謇的 “朝鮮善後六策” 和李延祜的 “戎幕十議” 的思想,再加上自己的獨特見解而著述《六八補》,就是典型事例。因此對壬午軍亂時期的韓中文人交流研究,從 “東亞文化” 的觀點出發,對19世紀的韓中文化交流史及韓國漢文學的研究有著相當重要的意義。